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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의 향기] 참는 것도 공부다

'참을 인(忍)'자가 세 번이면 살인도 면한다는 말이 있다. 혹자는 여석압초(如石壓草, 돌로 풀을 누르는 것)라 하며, 임시방편인 참는 것을 바람직한 수행법으로 여기지 않기도 한다. 참는 것도 마음을 닦는 방법이 될 수 있을까.   대중목욕탕 사우나에 가면 시간을 재기 위한 모래시계가 놓여 있다. 보통은 명상이나 경을 암송하지만, 때로는 모래시계 안의 모래가 흘러내리는 모습을 관찰하기도 한다. 나름 재미가 있어 지루함을 달래기에 좋다. 모래가 반쯤 차 있는 초반에는 감지하기 어려울 정도로 모래표면이 서서히 내려간다. 그러던 모래 표면이 마지막 1cm 정도를 남기고는 순식간에 사라진다. 모래가 흘러내리는 양은 일정하지만, 체감 속도가 그렇다는 말이다.   영어, 그림, 서예, 자전거를 배울 때도 비슷했던 것 같다. 초반의 지루함과 어려움을 어느 정도 감내하고서야 재미를 느끼기 시작했고, 배우는 속도도 빨라졌다. 만약 초반의 지루함을 견디지 못하고 사우나를 나와 버렸거나 영어, 그림, 서예, 자전거를 포기했다면 아무것도 얻지 못했을 것이다.   대종사께서는 좌선 수행을 '오래오래' 하라고 하셨고, 계율 수행은 '죽기로써' 하라고 하셨다. 몸과 마음을 정신없이 사용하는 현대인들에게 '가만히 앉아서 생각을 멈추는' 명상은 1시간은 고사하고, 10분, 아니 1분도 만만한 일이 아니다. 몸과 마음을 제멋대로 사용하던 일반인들이 이런저런 계문들을 정해서 지키는 일도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짧게는 수년, 길게는 수십 년, 수십 생을 거쳐 형성된 습관을 바꾸고 업(業)에서 자유로워지는 일이 간단할 까닭이 없다. 산술적으로는 그만큼의 시간과 에너지가 필요하다고도 볼 수 있다.   제자가 물었다. "예로부터 대개 계율(戒律)을 말하였으나 그것이 도리어 사람의 순진한 천성을 억압하고 자유의 정신을 속박하여 사람을 교화하는데 지장이 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대종사께서는 "사람이 혼자만 생활한다면 별 관계가 없을지 모르나 세상은 모든 법과 규칙이 엄연히 존재하기 때문에, 부당한 행동을 한다면 사회는 물론 개인도 편안하지 못할 것이다. 그러므로 사람이 세상에 나면 일동일정을 조심하여 엷은 얼음 밟는 것 같이 하여야 인도에 탈선됨이 없을 것이며, 그러므로 수행자에게 계율을 주지 않을 수 없다" 하셨다. 참 자유는 방종(放縱)을 절제하는 데에서 오기 때문에 참 자유를 원하는 사람은 먼저 계율을 잘 지켜야 한다.     수행이라는 것은 처음에는 자유를 구속하는 것처럼 보이나, 궁극에는 진정한 자유를 얻게 하기 위함이다. 유가에서 70세를 이르는 종심(從心)은 종심소욕 불유구(從心所欲不踰矩, 마음이 하고자 하는 바를 좇았으되 법도에 어긋나지 않다)의 준말이다. 뭐든 하고 싶은 대로 해도 진리와 도덕에 벗어남이 없다? 생각만 해도 설레는 이야기이다. 불가에서 추구하는 해탈(解脫, 마음의 자유)에 다름 아니다.     부처님께서도 여섯 가지 수행덕목의 하나로 인욕을 말씀하셨다. 인욕(忍辱)이나 금욕(禁慾)은 마음을 수행하는 과정에서 반드시 필요한 부분이다. 참는 것도 공부 맞다.   drongiandy@gmail.com  양은철 / 교무·원불교 미주서부훈련원삶의 향기 공부 종심소욕불유구 마음 계율 수행 해탈 마음

2024-04-08

[삶의 향기] 일기를 적어보자

지난 일을 돌아보고 교훈을 얻는 일은 일신우일신(日新又日新)의 기본이다. 소태산 대종사께서는 사람의 마음은 지극히 미묘하여 잡으면 있어지고, 놓으면 없어지기 때문에 '챙기는 마음(Mindfulness)' 없이는 마음을 닦을 수 없다고 하셨다. 일기는 챙기는 마음을 '챙기게' 해 주는 효과적인 방법이다.   마음공부로서 일기 기재는 다음과 같이 할 수 있다.   첫째, 일을 당해 심신을 처리한 바를 적는다. 직업과 배우자 선택에서부터 자장면과 짬뽕의 선택에 이르기까지 일상은 판단과 결정의 연속이다. 판단과 결정의 질과 방향은 우리의 일생뿐만 아니라 영생을 좌우한다. 문제는 우리네 인간사가 '1+1=2'처럼 간단치 않다는 데 있다. 과거 본인의 판단과 결정이 진리에 부합했는가에 대한 분석은 앞으로 마주할 비슷한 상황들을 밝게 분석하고 빠르게 판단하는 데 도움을 준다.   둘째, 일상에서의 깨침을 적는다. 매일 지고 뜨는 해를 보며 생사가 시작과 끝이 아닌 '변화'라 하신 부처님 말씀을 떠올릴 수도 있고, 내비게이션을 보고 인생의 길잡이인 경전을 떠올릴 수도 있다. 거창한 것도 좋고 일상의 소소한 깨침도 좋다. 추상적이고 관념적인 개념들의 구체화 하는 일기를 통해 진리에 대한 이해가 깊어질 수 있다.     셋째, 하기로 한 일과 하지 않기로 한 일을 대조한다. 일반적 의미의 일기라기보다는 '계획표 점검'에 가까운 일기이다. '하루에 만보 걷기' '좌선 30분 하기'처럼 하기로 한 일도 있을 수 있고, '밥 먹을 때 소리 내지 않기' '화날 때 일단 멈추기'처럼 하지 않기로 한 일도 있을 수 있다. 것이다. 본인의 수준과 상황에 따라 조목을 정하고, 조목의 내용에 따라 횟수나 점수 등으로 대조하면 된다.   간혹, 일상이 비슷비슷해서 일기 적을 내용이 별로 없다고 하시는 분들이 계시다. 단순하기로 하면 기숙사 생활을 했던 필자의 예비 교무시절이 제일일 것이다. 그럼에도, 일기 거리는 차고 넘쳤다. 살피기로 하면 마음 같이 변화무쌍한 것이 없기 때문이다. 진리에 대해 공부하는 수업시간의 다양한 감상부터 걸을 때, 밥 먹을 때 수시로 드는 생각들까지. 도반들과 일을 하며 드는 온갖 마음 작용들. 살피기로 하면 한도 끝도 없는 것이 일기거리이다.     먹고 살기도 바쁜데, 일일이 마음 바라보면서 살면 너무 스트레스 받을 것 같다고 하시는 분들도 계시다. 누이가 식이요법을 통해 건강이 몰라보게 좋아졌다. 처음에는 칼로리와 양을 계산하고 식사 시간 맞추는 일이 고역이었지만, 6개월 정도 지난 후부터는 먹고 싶은 대로, 하고 싶은 대로 요리를 해도 건강식단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았다고 한다.   마음공부도 누이의 식이요법과 크게 다르지 않다. 하고 싶은 대로 마음을 사용해도 진리에 크게 벗어나지 않는 경지에 이를 수만 있다면 그 정도의 불편과 번거로움이 대수일까.   부처님께서는 큰 자유를 원하는 사람은 챙기는 마음(Mindfulness)을 먼저 닦아야 한다고 하셨다. 일기는 마음을 구속하기 위한 것이 아닌, 마음의 자유를 얻게 하는 '공부'이다.   drongiandy@gmail.com 양은철 / 교무·원불교 미주서부훈련원삶의 향기 마음 작용들 일기 기재 일기 거리

2024-03-11

[삶의 향기] 천상락과 인간락

행복의 정의는 각각 다를 수 있겠으나, 사람은 누구나 행복을 추구한다. 행복은 크게 천상락과 인간락으로 나눌 수 있다. 천상락은 도로써 즐기는 마음의 행복이다. 부처님께서 깨달음을 얻으신 후 형상 있는 물건이나 환경을 초월하고 생사고락과 선악인과에 해탈하시어 어느 경우에나 마음이 편안하셨던 모습이 천상락이라 할 수 있다.   인간락은 형상 있는 세간의 오욕락을 말하는 것으로, 형상 있는 물건이나 환경에 의하여 만족을 얻는 것을 말한다. 부처님께서 출가 전에 위는 국왕의 자리에 있고 몸은 이미 만민의 위에 있어서 좋아하는 것과 즐거워하는 바를 마음대로 할 수 있었던 것이 인간락이라 할 수 있다.   대학 입시철이 되면, 교회에서 통성 기도를 하고 절에서 간절히 108배를 올리는 수험생의 부모님을 흔히 볼 수 있다. 종교가에서는 천상락을 주로 다루다 보니, 인간락을 추구하는 것을 불편해 하시는 분들도 있고, 심한 경우에는 이를 비난하거나 경멸하시는 분들도 있다.     고통을 피하고 행복을 추구하는 것은 인지상정이다. 자녀의 대학 합격이나 남편의 사업 번창, 가족의 건강을 기원하는 일이 성불제중이나 세계평화를 기원하는 일만큼 훌륭하다고는 할 수 없을지 모르지만, 과연 비난을 받을만한 일일까?   통념과 다를지 모르지만, 부처님께서는 행복의 조건으로 자급자족과 물질적 부를 언급하시며 정당하게 돈을 벌고 사용하는 법을 가르치셨고, 부자, 사제, 부부, 친구, 노사(勞使), 승속의 도리에 대해서도 법문을 하셨다. 정치, 경제, 통치에 대해서도 관심을 갖고 때로는 통치자에게 경제에 관한 조언도 하셨을 만큼 '세속'을 소홀히 다루지 않으셨다.   대종사께서도, 정당한 일을 부지런히 하고 분수에 맞게 의.식.주도 수용하며, 피로의 회복을 위하여 때로는 여가시간도 가지라고 하셨고, 생활이 향상되는 이 시대에 좁은 법만으로는 세상을 제도하기 어려우니 불법이 성과 속을 초월하여 개인.가정.사회.국가.세계에 두루 활용되게 하여야 한다고 하셨다.     물질에만 치우치고 정신을 등한시하면 육신은 완전하나 정신에 병이 든 사람이 되고, 정신만 중시하고 물질을 도외시하는 세상은 정신은 완전하나 육신에 병이 든 사람과 같다. 안으로 정신문명을 촉진하여 도학을 발전시키고 밖으로 물질문명을 촉진하여 과학을 발전시켜야 결함 없는 온전한 세상이 될 수 있다. 천상락이 기본이지만, 인간락이 없으면 온전히 행복한 삶이라고 할 수 없다. 토굴의 수많은 수행자의 구도심은 존경하지만, 불가에서 추구하는 이상적인 인간의 모습이 아닌 이유이다.     돈과 물질문명은 선용(善用)할 방도를 찾을 일이지 무시하거나 멀리할 일이 아닌 것처럼, 인간락도 정당한 방법으로 누릴 일이지 무시하거나 경멸할 대상은 아닌 것이다.     진리적이고 사실적이지 않는 신앙생활로 추구하는 것이 문제인 것이지, 종교인으로서 인간락을 추구하는 것 자체가 부끄러운 일은 아니다. 단, "인간락만 즐겨하면 천상락은 영원히 멀어지고 천상락을 즐겨하면 인간락은 자연히 따라오게 된다."는 부처님의 말씀은 명심해야 할 것이다.     drongiandy@gmail.com  양은철 / 교무·원불교 미주서부훈련원삶의 향기 천상락 인간락 완전하나 정신 완전하나 육신 자급자족과 물질적

2024-02-12

[삶의 향기] 세상에서 가장 잘한 일

새해 첫 침례교 목회자들의 모임이 샌타아나 임마누엘 교회에서 있었다.     모임 장소를 제공한  한 목회자가 본인의 간증이라면서 자기가 '세상에서 가장 잘한 일' 은 현재의 사모님을 만나 결혼한 일이라고 말한다.   배우자에게 이보다 더 큰 찬사의 말이 있을까. 모든 목회자들의 심정은 다 똑같다. 특히 중소형 교회의 경우 여성 성도들도 많고 식사 시간과 같은 친교나 아동을 위한 주일학교에 사모님의 도움 없이는 목회를 할 수 없다. 이러한 고백은 사모님들의 헌신과 희생에 감사하는 한마디와 같다.     이 말을 한 목사님은  미국에서 교회를 개척할 때 너무 힘들어 자기의 멘토인 한국의 선배 목회자에게 조언을 구했다고 한다.  그러자 대답이 "네가 이제야 목사가 되는구나" 하면서 제대로 목회자의 길을 가고 있으니 인내하라고 격려해주었다고 한다.     그 후 30여 년을 넘게 목회를 하고 있는 가운데 이제는 오히려 은퇴 연령이 조금 지났어도 여전히 목회를 계속하고 있다고 했다.  그러면서 어려운 목회를 하고 있는 후배 목사들에게  새해에도 인내하고 정진하라고  격려한다.   지난해 말 송년 목회자 모임이 토런스 지역 조은교회(담임목사 김우준)에서 있었다. 아동까지 해서 120명이나 모였다. 사회를 본 한 목회자는 경품 주는  순서가 있다고 했다. 목회자들에게  아내 되는 사모에게 미안한 것 3가지를 메모지에 써서 제출하라고 했다. 반면에 사모들에게는 남편 되는  목사님이 멋지게 보인 3가지를 써서 내라고 했다. 상대방이 3가지 중에 한 가지라도 맞추면 상품을 주겠다고 했다. 대부분의 사모들은 목사님들이  무엇을 미안해 하는지를 잘 알고 있었다. 늘 경제적으로 쪼들리게 하는 일이나 가족들을 위해 시간을 못 내주는 일이라고 했다. 그리고 사모들을 과도하게 목회 돕는 일에 부려먹어 미안해 한다고 써서 상품을 타갔다.   이번에는 사모들이 자기 남편의 가장 멋진 점 3가지를 쓴 메모지를 공개했다. 내 생각에는 남편이 설교를 잘해 멋있다든지, 인품이 좋다든가 하는 존경의 내용이 있을 것을  기대했다. 그런데  생각할 시간이 촉박해서인지 대부분 공란이었다. 한 분이 남편 되는 목사가 잠 잘 때가 제일 멋있었다고 썼다. 모두 웃음바다가 되었다. 힘든 목회로 곤히 자는 남편인 목사가 귀엽고 가장 멋지다고 생각한 모양이다.     33년 전 북가주 헤이워드 지역에서 목회를 하면서 12명의 교회 아동들을 데리고 아이스 스케이트장에 간 적이 있다. 교회에 돌아와 보니 한 명이 빈다. 둘째 아들 여호수아를 두고 온 것이다. 교회 밴을 가지고 급히 가보니 녀석이 길바닥에서 울고 있었다.  달려가  안아주고 수없이 미안하다고 했다. 목회자로  교인들은 챙기지만 정작 내 자식을 못 챙긴 부족한 목회자 아빠였다.   목회자들은 늘 사모와 가족에게 미안한 마음으로 목회를 한다는 점을 교인들도 알아주면 좋겠다.   ynms2017@gmail.com   윤덕환 / IMB 선교사삶의 향기 침례교 목회자들 송년 목회자 선배 목회자

2024-01-29

[삶의 향기] 마음을 '공부'해야 하는 이유

어린 시절 아버지께서 전자레인지를 사오셨다. 병에 든 음료수를 데우려고 뚜껑을 닫은 채로 전자레인지에 넣고 스위치를 눌렀다. "펑!" 소리와 함께 음료수는 물론 전자레인지도 산산 조각이 났다. 전자레인지가 흔하지 않던 시절이라 사용법에 익숙지 않았던 탓이다.     제품을 제대로 사용하기 위해서는 설명서를 통해 사용법을 공부해야 한다. 마음도 마찬가지이다. 원리에 맞게 사용하지 않으면 사고가 날날 수밖에없다. 마음도 '공부'를 해야 하는 이유이다.     '내 마음 나도 몰라'가 제목인 가요가 있다. '내 마음'이라고들 하지만 마음대로 안 되는 것이 또한 우리의 마음이다. 마음을 공부해야 하는 이유는 더 있다.   첫째, 마음은 행불행을 좌우한다. 팬데믹 시기에 한국에 갈 일이 생겼다. 비행기를 타고 보니 옆의 한 좌석이 비었다. '아, 편하게 갈 수 있겠구나!' 생각에 행복했던 마음도 잠시. 화장실을 가기 위해 자리에서 일어나보니, 대부분 누워 가고 있었다. 행복했던 마음은 순식간에 불평으로 바뀌었다. 옆의 한 좌석이 비었다는 물리적 사실은 변함이 없지만, 비교하는 마음 때문에 행복은 순식간에 불평으로 바뀐 것이다.   대종사께서는, "마음이 선하면 모든 선이 이에 따라 일어나고, 마음이 악하면 모든 악이 이에 따라 일어나나니, 그러므로 마음은 모든 선악의 근본이 된다." 하셨다. 모든 것(행복과 불행)은 마음에서 비롯된다는 '일체유심조'가 불법의 핵심인 이유이다.   둘째, 마음은 늘 사용한다. 7~8년 전에 샤워꼭지가 고장이 났다. 부품만 간단히 교체하면 될 것 같았는데 생각보다 복잡했다. 겨우 고치긴 했지만, 지금은 어떻게 고쳤는지 전혀 기억이 안 난다. 샤워꼭지 수리하는 법은 몰라도 치명적이지 않다. 왜냐면 자주 있는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마음은 하루에 몇 시간이나 사용할까? 수면 중에도 무의식이 작용한다고는 하지만, 수면시간을 제외하더라도 최소 16시간은 사용한다. '마음 사용하는 법'은 일생에 샤워꼭지 고치는 법과는 달리 모르면 피해가 치명적일 수밖에 없다. 반대로 잘 알면 이익도 그만큼 크다는 말이 된다.   셋째, 누구에게나 필요하다. 칼이 좋은 것인가, 나쁜 것인가? 어떻게 사용하느냐에 따라 다르다. 돈, 지식, 권력은 좋은 것인가, 나쁜 것인가? 마찬가지이다. 돈, 지식, 권력이 있는 사람이 훌륭한 일도 많이 하지만, 나쁜 일로 뉴스와 신문 지면을 장식하는 사람도 그들이다.   "이 세상에서 어떠한 공부가 제일 근본 되는 공부입니까?" 제자의 질문에 대종사께서는, "마음공부가 제일 근본 되는 공부이다. 마음공부는 모든 공부의 기본이니, 마음공부가 없으면 모든 공부가 다 바른 활용을 얻지 못할 것이다." 하셨다. 마음공부가 바탕이 되지 않으면 우리가 애써 얻은 재주와 능력도 무용지물일 뿐 아니라 개인은 물론 인류에게 해악만 끼치게 된다.     내 마음이지만 마음의 주인이 되지 못해 늘 희로애락에 끌려다닌다. 마음을 제대로 '공부' 해서 희로애락을 부려 쓰는 진정한 마음의 주인이 되자.     drongiandy@gmail.com 양은철 / 교무·원불교 미주서부훈련원삶의 향기 마음 공부 마음 때문 지식 권력 제일 근본

2024-01-08

[삶의 향기] 포기의 지혜

필자가 속한 종단은 생활과 동떨어진 진리공부를 배격한다.     생활불교를 지향하다 해도 출가자의 모습이 일반인과 같을 수는 없다 보니, 출가를 위해서는 고치거나 포기해야할 것들이 있게 마련이다.   필자도 세속에서는 큰 문제가 안 되지만, 출가 생활에는 문제가 될 수 있는 습관이 있었다. 처음 4~5차례 실패를 했을 때만 해도 크게 걱정을 안 했다. 10차례 정도 실패를 하고 나니, '이 습관을 고칠 수 있을까'하고 의구심이 들기 시작했다. 20번 정도 실패를 한 이후에는 '출가를 포기해야하나' 하는 지경에 이르게 되었다.   그 때 '억만 번'이라는 표현을 경전에서 접했다. 좌선이든, 경전 공부든, 계율 수행이든 될 때까지 억만 번이라도 해야 한다는 말씀이었다. 하긴, 영겁의 세월동안 익혀온 습관을 고작 '20번'만에 끊을 수 있을까. 경전을 '이해'가 아니 '연습'하라 하신 이유를 알 것 같았다. 심기일전해서, 결국 50여 차례 실패를 더 한 후에야 마침내 습관을 고치고 출가를 할 수 있었다.   평생을 평화운동에 매진해 오신 분이 있다. 세속에 대한 의무나 유혹에 자유로운 편인 출가자임에도 마음을 안 챙기면 초심을 잊기 쉽다. 속세에 살면서도 평생 특정 이상과 가치 실현에 일생을 바치신 분들이 더 존경스러운 이유이다.   이처럼 '포기하지 않는 마음'은 도가는 물론 사회에서도 중요한 가치이다. 대종사께서 "정성은 중단 없는 마음을 말하고, 만사를 이루려 할 때에 그 목적을 달하게 하는 원동력"이라고 하셨다.   "포기하지 마"는 모든 경우에 만병통치약일까.     오랜 무명시절을 거쳐 마침내 성공한 가수가 무명가수 오디션에 심사위원 자격으로 참가했다. 자신도 포기하고 싶을 때가 많았다며 절대 꿈을 포기하지 말라는 조언을 무명가수들에게 하는 것을 들으면 섬뜩한 느낌이 들기도 한다. 성공확률이 얼마나 될까. 만약, 그 무명가수가 객관적으로 실력이 현저히 부족하다면 어떤가. 게다가, 결혼을 해서 부양할 가족들이 있음에도 수입이 전혀 없는 상황이라면 어떤가.     의사가 꿈이라는 이유로 대한민국에서 0.1%의 우수한 학생들만 입학할 수 있다는 최고의 의대에 10년 동안 지원하고 있는 중위권 성적의 학생에게 "꿈을 포기하지 말고 끝까지 노력하세요"라고 조언한다면 어떻게 될까.     두 경우 모두 재벌가 자손이라면 예외일 수 있겠지만, 보통의 서민이라면 때로는 포기할 줄도 알아야 한다.   대종사께서는 "어린이나, 노인, 환자가 아니라면 사람으로서 면할 수 없는 자기의 의무와 책임을 다하는 동시에, 힘 미치는 대로 자력 없는 사람을 도와야 한다"고 가르친다.     사회의 구성원으로서 각자의 의무와 책임은 꿈 못지않게 중요하다. 생활을 위해 일방적으로 꿈을 포기하는 것도 신중해야 하지만, 꿈을 위해 일체의 책임과 의무를 방기하는 것도 옳지 못하다. 노력만 한다고 누구나 국가대표가 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현실을 도외시해서는 안 된다.     최소한 세계평화 같은 궁극적 가치 추구나, 성불제중의 서원과 마음공부에 있어 포기하지 않는 태도는 여전히 의미가 있겠지만, 다른 분야에서는 때에 따라 포기의 지혜와 용기도 필요해 보인다.   drongiandy@gmail.com 양은철 / 교무·원불교 미주서부훈련원삶의 향기 지혜 무명가수가 객관적 출가 생활 무명가수 오디션

2023-12-11

[삶의 향기] 그 많던 땅강아지는 어디로 갔나

서리가 내려서 땅콩 가을걷이를 서둘러야 한다며 함께 가자는 지인의 말에 경기도 여주로 나들이했다. 땅콩밭까지는 농로를 제법 걸어야 했다. 한 달 전까지 연노랑을 머금던 평야가 이제는 진노랑 즙을 삼킨 듯했다. 논두렁에선 들풀 마르는 냄새가 진하게 번졌다. 벼잎 위의 메뚜기, 강아지풀에 살포시 몸을 앉힌 고추잠자리를 보니 옛 기억이 불현듯 살아났다.   땅콩밭에 도착하니 하트 모양의 잎과 보라색 줄기를 가진 고구마도 바로 옆 뙈기밭에서 수확을 기다리고 있었다. 함께 일하던 땅콩밭 주인이 고구마와 땅콩은 옛날 배고팠던 시절 구황작물로 재배했는데, 뿌리가 땅속으로 파고 들어가기 쉬운 모래땅에서 잘 자라 여주를 대표하는 작물이라 소개했다. 또 이 동네 밭은 친환경 농법 덕에 토양이 오염되지 않아 땅강아지도 자주 나타난다고 했다.   땅콩 줄기를 당기자 아닌 게 아니라 땅강아지 서너 마리가 딸려 나온다. 딸려서 나온 땅강아지들은 눈이 부시다는 듯 앞발로 사레를 치며 몸을 좌우로 흔든다. 그중 한 마리를 집으니 예나 지금이나 미는 힘이 보통이 아니다. ‘땅(土)’속에 사는 ‘강아지(狗)’인 땅강아지(土狗)가 멀쩡하게 살아 있었다.   바로 옆 고구마밭에서 일하던 농부가 땅강아지는 식물 뿌리를 먹어 속이 상하지만 땅을 파 산소를 공급하고 빗물도 잘 스며들게 하니 밉지는 않다고 했다. 또 힘이 세고 공격성이 강한 가물치나 뱀장어 낚시에는 땅강아지를 최고의 미끼로 친다고 한다. 아마도 땅강아지의 왕성한 움직임 때문일 것이다.   길에 포장이 안 돼 온통 흙이었던 시절 아이들은 독이 없는 야행성 곤충인 땅강아지를 잡아서 장난감 삼아 놀았다. 어릴 적 평상에서 저녁을 먹을 때라면 땅강아지는 전등이 있는 평상 쪽으로 다가왔다. ‘나도 좀 끼워줘’라는 듯 말이다. 이는 땅강아지에게 ‘빛을 쫓아가는’ 추광성(趨光性)이 있어서다. 그러던 땅강아지들이 모습을 감추게 된 건 급속한 도시화로 땅이 없어진 탓이다.   필자도 실의에 젖었던 어린 시절 땅강아지를 집어서 아래에서 위로 보기도 하고, 책상 위에 놓고 기어가는 모습도 봤다. 확대경으로도 관찰했다. 확대경으로 들여다본 땅강아지는 온몸이 강아지 털처럼 부드러운 털로 덮여 있었다. 삽날처럼 생긴 종아리는 넓적하고 튼튼해 아주 듬직한 모습이었다.   땅강아지도 검고 반짝이는 눈동자로 나를 응시하는 듯했다. 땅강아지의 검은 눈에는 호기심이 가득 차 있었다. 땅강아지와 교감하는 일이 소소한 낙이 되자 땅강아지로부터 알게 모르게 힘과 기를 받았다. 그때 세상에는 천기(天氣)만 있는 게 아니라 지기(地氣)도 있다는 걸 실감했다.   땅강아지와의 우정은 그 후에도 계속됐다. 주말이면 근교에 나가 땅강아지를 찾았다. 땅강아지의 주 거주지는 땅속이고 핵심 역량은 땅 파는 재주이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다른 재주도 조금씩 있다. 날기도 하고, 기어오를 줄도 알며, 물통 속에 넣으면 앞발을 움직이며 헤엄치기도 한다.   땅속에서 나와 강아지와 같은 발랄함을 보여주는 땅강아지에게 ‘땅’과 ‘강아지’를 합쳐서 작명한 데서 옛사람들의 재치가 느껴진다. 두더지처럼 땅을 파는 땅강아지의 생김새는 귀뚜라미를 닮아서 영어로는 ‘모울 크리킷’이라 한다. ‘모울(mole)’은 두더지를, ‘크리킷(cricket)’은 귀뚜라미를 의미해서다. 땅강아지와 모울 크리킷, 어느 쪽이 더 멋진 이름일까.   땅콩 수확을 마친 후 정영록 서울대 명예교수에게 여주에서 땅강아지 본 이야기를 했다. 여주처럼 모래가 많은 하동이 고향인 그는 땅속에 웅크리고 있다가 반가운 듯이 나오는 땅강아지를 보면 은퇴한 베이비 붐 세대가 생각난다며 내게 이런 말을 했다.   “우리 사회에는 전등 빛에 반갑게 다가오는 땅강아지를 연상시키는 ‘베이비 부머’라는 은퇴 세대가 있습니다. 신생아 출산 25만의 인구절벽 시대를 극복할 수 있는 한 가지 대안은 인구의 15%를 차지하는 베이비 부머를 경제활동에 투입해 젊은 세대를 도와야 합니다. 그래야 노동력 부족을 극복할 수 있습니다.”   일리 있는 말이다. 게다가 베이비 부머는 경제활동에 참여한 경험이 있다. 요즘 세대들이 ‘보다 나은 삶을 위해’ 일한다면 그들은 ‘살기 위해’ 일했다. 참을성이 많은 그들은 영화 ‘인턴’에서 70세에 입사한 주인공이 경륜과 성실로 자리를 잡아나가듯 소정의 인턴 과정만 마치면 ‘산업역군’으로 거듭날 수 있다.   땅콩밭에서 필자가 마주했던 땅강아지들을 떠올려 본다. 그들이 이런 말을 하려 했던 건 아닌지 생각해 본다. “혹시 저를 부르셨습니까?” 깊어가는 가을, 오늘도 숨어 우는 바람 소리에 베이비 부머의 장탄식이 섞여 있는 듯하다. 곽정식 / 수필가삶의 향기 땅강아지 땅콩밭 농부가 땅강아지 시절 땅강아지 메뚜기 강아지풀

2023-11-26

[삶의 향기] 미운 마음 아닌, 측은한 마음 가져야

종교와 정치는 인류의 행복이라는 공통의 가치를 추구한다.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마음의 평화'다. 정치의 목적인 '건강한 사회질서 확립'도 궁극적으로는 마음의 평화를 위해서이다.   종교는 도덕에 근원하여 사람의 마음을 가르쳐 죄를 짓기 전에 미리 방지하고 복을 짓게 하는 법인 것에 반해, 정치는 법률에 근원 하여 일의 결과를 보아서 상과 벌을 베푸는 법이라고 할 수 있다.     흔히 종교와 정치는 엄부(嚴父)와 자모(慈母)에 비유된다. 엄부와 자모가 각각의 역할을 다 할 때 자녀는 올바로 성장하고 행복한 삶을 누리게 된다.     하지만 현대사회의 보편 원리인 '정교분리(Separation of church and state)'에서 볼 수 있듯이, 방법이 다르나보니 종교와 정치는 화합보다는 주로 대립하고 충돌하면서 발전해 왔다.     레미제라블의 '정의와 자비'는 대학 철학 교양 수업의 단골 리포트 주제이다. 자녀교육에 있어 엄부와 자모의 충돌은 흔히 볼 수 있고, 시위 대학생을 숨겨준 명동 성당의 위법 여부, 미국 내 서류미비자에 대한 태도 등 정의와 자비 관련 이슈는 일상에서 늘 접하고 있다.   평생 장발장을 추적한 형사 자베르와 은식기 절도를 용서해 준 미리엘 주교 중 누가 더 우리 사회에 필요한 인물일까.   소매치기하는 사람을 붙잡았다면 어떻게 처리하는 것이 바른 취사일까. 성직자인 필자는 어떻게 취사하는 것이 맞을까.     먼저, 이러한 일을 처리하기 위하여 법이 있는 것이니, 경찰에 알린다. 혹은 나에게 일어나는 모든 일은 내가 지은 결과이니, 인과의 보응으로 생각하고 넘어간다. 또는 종교인이 아니라면 경찰에 신고하겠지만, 종교인이기 때문에 선처하고 경찰에 신고하지 않는다. 이 모든 건 예상 가능한 답변들이다.   일단 인과로 알고 참회하고 보복하는 마음을 갖지 않아야 한다. 불교적으로 보면 나쁜 사람은 없다. 단지 어리석을 뿐이다. 그들이 받을 죄업을 생각하면 오히려 가엾은 마음(대비심)을 가져야 한다. 인과와 대자대비심이면 충분할까.   원불교에서는 도덕법과 실정법을 모두 포함하는 법률의 은혜를 말한다. 법률이 있어야 안녕 질서를 유지하며 우리를 평안히 살게 하기 때문에 법을 잘 알고 준수해야 한다. 덕인은 단순히 유순하기만 해서는 안 되고, 시비이해의 정확한 판단도 하는 사람이어야 한다. 즉, 인과에 대조하고 자비심을 갖되, 현행법에 따라 신고도 해야 한다. 단, 신고를 하는 경우에도 미운 마음이 아닌, 측은한 마음과 새사람이 되기를 간절히 바라는 마음을 가져야 한다.     육신의 병도 예방이 치료보다 중요하듯, 범죄의 경우에도 처벌보다 예방이 중요함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정치인들은 서로 '내로남불(이중기준)'을 비난하지만, 예수님, 부처님 수준이 되어야 가능한 일이다.     종교 즉 도덕은 정치의 근본이고 도덕의 근본은 마음이다. 마음의 원리를 잘 알고 수행하여 죄를 미연에 방지할 수 있는 성품을 갖추어야 한다.   직접적으로는 정치인들이 개인이나 정파의 이익에 가리지 않는 정견(正見)을 통해 바른 법과 제도를 마련할 수 있게 하는 것이 수도인, 교화자로서 종교인들의 본분이라 할 수 있겠다.     drongiandy@gmail.com 양은철 / 교무·원불교 미주서부훈련원삶의 향기 마음 사회질서 확립 자모가 각각 시위 대학생

2023-11-13

[삶의 향기] 고(苦)와 낙(樂)의 원인

인생은 고해(苦海)다. '고통'이라고 하면 사랑하는 이의 죽음이나, 전쟁, 기아 같은 심각한 것들을 주로 떠 올리지만, 불교에서 말하는 고통은 '만족스럽지 못한 상태'에 더 가깝다.     마음이 불편하고 힘들게 하는 것은 세계평화나 남북통일 같은 거창한 것 보다는 동료와의 언쟁이나 말실수 같은 사소한 것들이 대부분이다. 행복도 일확천금이나 대학 입학, 사업성공 보다는 '마음이 요란하지 않고 편안한 상태'가 불교에서 말하는 행복에 가깝다.   종교 생활을 하는 목적은 무엇일까. '고를 피하고 낙을 누리자는 것'이 아닐까. 어떤 분은 종교의 목적을 행복에 국한 시켜서는 안 된다고 하시며, 세계평화나 깨달음 같은 좀 더 '폼 나는 것'(?) 이어야 한다고 항변한다.     부처님께서 일생동안 하신 팔만사천법문은 크게 두 가지로 분류할 수 있다. 하나는 고통, 다른 하나는 고통의 소멸. 필자가 출가한 이유도, 나름 게으름 피우지 않고 교무생활을 하는 것도 결국은 행복하자는 것에 다름 아니다. 행복 없이는 세계평화와 깨달음도 있을 수 없고, 참다운 행복은 세계평화와 깨달음까지를 포함한다.   육신의 병에는 원인이 있고, 원인이 있으면 해결법이 있듯이 마음의 병인 괴로움에도 원인이 있고 해결책이 존재할 것이다. 오늘은 낙을 버리고 고로 들어가는 원인 중 '고락의 근원을 알지 못함'에 대해 생각해 보자.   무식이 죄일까. 다소 불편할 수는 있겠으나, 굳이 죄라고까지 말하기는 어려울 것 같다. 불가에서는 어떨까. 무식은 죄 맞다. 물론 '지식의 양이나 학력'을 의미하는 사회의 무식과 '분별주착에 의한 어리석음'을 뜻하는 불가의 무식은 차이가 있겠지만, 불가에서 무식(어리석음)은 죄가 맞다.   모르는 것이 왜 죄가 될까. 괴로움을 초래하기 때문이다. 머리가 나쁘면 손발이 고생한다는 말이 있다. 어린 시절, 아버지께서 새로 사온 전자레인지안에, 뚜껑이 닫힌 박카스를 넣고 돌리는 바람에 병이 폭발하는 낭패를 본 적이 있다. 사용설명서를 숙지하지 않은 탓이다. 중학교 수학시험 시간에 공식이 기억 안 나서 3분이면 풀 문제를 모든 경우의 수를 일일이 대입해서 20분 만에 푼 적도 있다. 머리가 나쁘면(진리를 모르면) 육체적 수고로움을 감수해야 한다.   인간사는 진리에 따라 움직인다. 진리를 모르고 인간의 시비이해를 판단하고 행동하면, 사용법을 모르고 전자레인지를 사용하는 것과 다를 바가 없다. 전자레인지는 깨지면 청소하고 다시 구입하면 그만이지만, 잘못된 판단과 행동은 영생을 그르칠 수 있다.   사회에서도 '몰랐다'는 것은 양형에 참고가 될 수는 있으나 불법행위에 대한 면죄부가 될 수는 없다. 몰라서 했다 하더라도 과속으로 타인에게 상해를 입히고, 마약 유통으로 사회를 병들게 했다면 죄를 묻는 것이 상식이다.     부처님께서도 자연과 부모님, 이웃과 법률의 은혜를 알지 못하는 것이 큰 배은(背恩)이라고 하셨다. 모르는 것(어리석음)은 죄라는 말이다. 부지런히 공부하자. 진리공부, 마음공부 말이다.   drongiandy@gmail.com  양은철 / 교무·원불교 미주서부훈련원삶의 향기 원인 진리공부 마음공부 중학교 수학시험 종교 생활

2023-10-09

[삶의 향기] 나는 안다, 아무것도 모른다는 걸

그 옛날 소크라테스의 명언은 오늘까지도 유효하다. 자기 자신을 아는 사람이 되거나 자기가 누군지 아는 사람을 만나는 일은 얼마나 드문 일인가. 게다가 날이 갈수록 내가 아는 건 아무것도 모른다는 것뿐이라는 생각이 든다.   요즘 가까운 지인들 사이에서도 밥 같이 잘 먹다가 기분이 상하기 일쑤다. 같은 일에 대해 너무 다른 견해를 갖고 서로 옳다고 우겨대기 시작하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눈치 보며 말없이 밥만 먹는 자리는 피곤하고 재미없다. 내 가까운 사람의 진짜 속내도 모를 판에 매스컴에서 매일 보는 정치인을 너무도 잘 아는 듯 핏대 올리며 욕하든지 역성드는 사람들을 보면, 참 순진하고도 어리석다는 생각이 든다.   우리가 누구를 잘 안다고 할 수 있을까. 가장 가깝다고 생각한 오래된 인연의 사람이 세상에서 가장 낯선 외계인으로 느껴진 경험을 해본 적 있는 사람은 안다. 가족이나 오랜 친구가 길에서 처음 본 사람보다 더 모르는 사람처럼 느껴질 수도 있다는 걸. 그런데도 우리는 매 순간 누군가에 관해 그를 잘 아는 듯 생각하고 말한다. “그 사람은 내가 잘 알아” “그는 그런 사람이 아니야” “그가 그렇지 않다는 건 내가 보장해” 등등. 나이가 들면서 우리는 점점 이런 확신이 사라져가는 게 정상이다. 그게 누구든 잘 알지도 못하면서 무조건 욕을 하거나 무작정 편을 들지는 말자고 생각한다. 비록 그 상대가 내 혈육이거나 자기 자신이라 할지라도.   비현실적인 과대한 자신감을 지니고 무조건 자신에게만 관대한, 자기중심적인 사람을 자기애성 성격장애, 심하면 자기애성 인격 장애라 부른다. 정신의학 전문가들은 그런 성향의 사람들을 우리 주변에서 흔하게 볼 수 있다고 말한다. 자신이 그런지 인식 못 하는 채 그 병에 걸려있는 경우도 드물지 않다. 그들은 대체로 자기 잘못을 인정하지 않는 성향을 지닌다. 습관적으로 모든 게 거짓말이기 일쑤이고, 수치심과 죄의식, 타인에 대한 공감 능력이 현저히 떨어진다. 무조건 남의 탓으로 돌리고 잘못을 뒤집어씌우기 일쑤다. 결국 자신마저 감쪽같이 속이는 병이다.   생각해보면 그런 성향의 사람들은 늘 우리 가까이 편재해 있었다. 아니다 싶으면서도 한동안 그 옆에 머무를 수밖에 없었던 몹시 개인적인 ‘우리들의 일그러진 영웅’을 떠올린다. 그때는 몰랐으나 절대 신뢰할 수 없는 자기애성 인격 장애 환자에게 내 허약한 영혼을 기대 본 사람은 안다. 한때 혹은 오래도록 우리가 기댔던 그 카리스마 넘치는 존재가 정작 자기 자신이 누군지 모르는 미성숙한 존재라는 사실을 완전히 파악하기까지 꽤 오랜 세월이 걸리기도 한다.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는 오래전에 이렇게 예언했다. “대다수의 편에 서는 게 꼭 옳은 건 아니다. 우리는 광기 있는 사람들에게서 벗어나는 걸 삶의 목표로 삼아야 한다.” 무릇 정신이 건강한 사람이란 자기 자신이 누구인지 아는 사람이다. 생각 없이 무조건 믿고 따르는 건 사이비종교의 속성을 떠올리게 한다. 칼 융에 의하면 사람들이 너무 쉽게 판단하는 건 사고하는 일이 어렵기 때문이다. 이 사람이 저 사람보다 좋다고 생각하고, 이 자식이 저 자식보다 낫다고 생각하며 편애하고 더 잘해주고, 그렇게 생각에 속고 휘둘리며 살아왔다는 걸 너무 뒤늦게 알게 되는 우리는 늘 어리석다. 다음 생이 있다면 지혜롭게 살리라.   연구에 의하면 우리가 지닌 지혜는 모두 부모로부터 물려받은 게 다일지 모른다. 과학자들은 지구의 수명은 인간이 그렇듯 무한하지 않다고 말한다. 매 순간 죽어가는 지구인, 우리는 누군가 말하듯 “악한 사람들 사이에서 사는 악한 사람들이다. 이 사실에 지혜롭게 대처하는 유일한 방법은 서로를 너그럽게 대하기로 합의하는 것이다.”(브리지드 딜레이니 『불안을 이기는 철학』)   하지만 인간은 계속 같은 잘못을 되풀이하며 살다가 죽는 게 일반적이다. 만일 그렇지 않은 개인이, 그렇지 않은 세상이 존재한다면 인류의 전쟁은 오래전에 종식되었을 것이다.   언젠가 우리가 끝없이 되풀이해온 분노와 복수를 드디어 끝낸, 아직 태어나지 않은 지혜로운 세대를 감히 우리가 꿈꿀 수 있을까. 뿌연 거리감이 걷히고 세상 풍경이 또렷이 보이고 들리기 시작하는 또 가을이다. 문득 엉뚱한 문장 하나가 떠오른다. “내 사랑은 얼마인가요?” 내게 그것은 “내 그림은 얼마인가요?” 같은 질문으로 들린다. 모든 것에 가격을 매기는, 물질이 마음을 이긴지 오랜 세상, 오늘 내가 아무것도 모른다 해도, 살아있다는 건 참 쓸쓸하고도 아름다워라. 황주리 / 화가삶의 향기 아무것 외계인 자기애성 성격장애 자기애성 인격 정신의학 전문가들

2023-09-29

[삶의 향기] 우주만물은 ‘서로 안에’ 있다

적적한 시골이라 누가 찾아오면 귀인을 만난 양 반갑다. 며칠 전 대문 열리는 소리가 들려 나가보니, 귀농한 젊은 친구가 환하게 웃으며 시금치 한 단을 건네준다. 이거 제가 키운 거예유. 붉은 흙이 그대로 붙어 있는 풋풋한 시금치. 감사의 말을 건넬 사이도 없이 그 친구는 바쁜 일이 있다며 낡은 트럭을 몰고 씽~ 사라진다. 나는 손을 흔들어 배웅한 후 시금치를 다듬으며 그가 한 말을 곱씹어본다.   이거 제가 키운 거예유! 겨우 귀농 2년차의 서툰 농부인 그가 씨를 뿌리고 김을 매고 키웠으니 스스로도 얼마나 대견했을까. 하지만 그의 말은 반만 진실이다. 어디 저 혼자 시금치를 키울 수 있단 말인가. 햇볕, 공기, 물, 바람, 그리고 땅속 미생물의 수고는? 나중에 그 친구를 다시 만나면 고맙다는 말은 하겠지만, 이런 생각이 드는 건 어쩔 수 없었다. 문득 틱낫한의 시 한 편이 떠올랐다.   ‘해가 내 안으로 들어온다,/ 구름과 강과 더불어 내 안으로 들어온다./ 나 또한 강으로 들어간다.// 구름과 강과 더불어 해로 들어간다./ 우리가 서로 안에 들어가지 않는/ 그런 순간은 없다.’(‘서로 안에 있음’ 부분)   이 단순 소박한 시는 우주만물이 ‘서로 안에 들어가지 않은/ 그런 순간은 없’다고. 하지만 인간 중심의 세계관에 갇힌 이들은 ‘서로 안에 있음’을 자각하지 못한다. ‘나와 너’를 따로 떼어 생각하는 분리의식에 사로잡힌 이들은 ‘나’라는 주체가 따로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나와 이웃, 나와 자연, 나와 하느님 사이에는 분리의 장벽이 세워져 있다.   이것이 세계가 직면한 위기의 뿌리. 사실 내 존재가 모든 타자로부터 ‘분리되어 있다’는 생각이야말로 망상에 다름 아니다. 어떤 수행자가 말한 것처럼 ‘꽃’은 ‘꽃 아닌 것들’ 없이 꽃일 수 없다. 꽃 아닌 것들, 즉 햇빛, 흙, 물, 바람, 공기, 곤충, 새 등이 없으면 꽃은 꽃으로 존재할 수 없다. 인간도 마찬가지. 나는 ‘나 아닌 것들’ 때문에 겨우 존재하는 것. 그러나 우리는 우주 안의 다른 존재 없이도 생존할 수 있는 양 착각에 빠져 살아간다. 이런 착각을 벗어나지 못한다면 우리는 인간의 삶을 파괴하고 결국 지구 공동체마저 파괴하고 말 것이다.   태초에 세상을 창조하신 분과 ‘서로 안에 있’다는 자각 속에 살았던 예수. 그는 그러한 자각을 자신의 삶으로 구현하며 분리의식 속에 사는 사람들을 일깨웠다. 예수가 지구별에 머무는 동안 남긴 유언과도 같은 기도문에는 그러한 소명이 잘 드러나 있다.   “아버지,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고, 내가 아버지 안에 있는 것과 같이, 그들도 하나가 되어서 우리 안에 있게 하여 주십시오.”(요한 17: 21~23)   그러니까 예수는 모든 존재의 원천이신 하느님과 자기 자신을 떼어서 생각할 수 없었던 것. 따라서 예수는 당신을 따르는 이들과도 ‘서로 안에 있음’, 즉 합일의 희열을 나누길 원했던 것이 아닐까. 신성한 원본(原本)이신 하느님을 모르는 이들에게, 본래 모든 존재가 하느님과 하나라는 것을 알려주고 싶어 했던 것.   실낙원 이후 인간을 지배한 것은 합일이 아니라 분리의 관습. 이 오래된 분리의 관습이 깨지지 않는 한 인간은 진정한 행복을 누릴 수 없다. 예수의 가르침을 ‘복음’이라 하는 것은 그것이 인간을 분리의 관습 속에 머무르게 하지 않고 신의 관습, 즉 합일의식을 일깨운 것이었기 때문이다. 복음의 알짬은 결국 ‘서로 안에 있음’을 깨닫는 것.   모름지기 나무들 없이는 살 수도 없으니 나와 나무는 ‘서로 안에 있음’이고, 밥 없이는 살 수 없으니 나와 밥은 ‘서로 안에 있음’이며, 지구 온난화로 빙산이 녹아내린다는 저 북극이 미치는 기후변화와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 속에 있으니 나와 북극은 ‘서로 안에 있음’이 아니겠는가. 그렇게 우주만물이 서로 안에 있다는 또렷한 자각으로 우리가 산다면, 지상의 모든 차별, 미움, 증오, 학대, 다툼, 갈등을 줄여나갈 수 있지 않겠는가.   자본주의가 야기한 지독한 이기심에 물들어 ‘서로 안에 있음’을 망각하고 살아가는 이 부박한 시절. 어떤 신학자는 이런 우리의 처지를 “자비를 유배 보냈다”(매튜 폭스)고 일갈했다. 자비를 유배 보낸 뒤 우리 삶의 처지는? 돈, 편리, 속도의 악령이 우리의 혼을 널름 삼켜버렸다. 이제라도 우리는 깨어나야 한다. 악령의 꾐에 속아 분리의 가위질만 계속하고 살 수는 없지 않은가. 실과 바늘처럼 분리된 것들을 꿰매는 사랑과 합일의 삶을 살아야 하지 않겠는가. 고진하 / 시인·목사삶의 향기 우주만물 농부가 원천이신 하느님 하느님 사이 아버지 아버지

2023-09-24

[삶의 향기] 상종하기 싫은 사람이 있을 때

살다 보면 여러 가지 이유로 상종하기 싫은 사람이 생긴다. 매너 또는 상식이 없어서, 이기적이어서, 지적 수준이 안 맞아서, 심지어 '주는 거 없이 미워서' 까지. 특히 정치적 견해나 종교적 입장이 다르면 원수가 따로 없다.   가장 손쉬운 해법은 상대를 피하는 것이다. 하지만, 근거지나 직장을 옮기는 것은 쉽게 할 수 있는 일도 아니다. '돌아이 질량보존의 법칙'이라 했던가. 어느 곳으로 옮기던 '돌아이'가 없으리라는 보장도 없다.   사람들은 저마다 특성이 있다. 특성이라는 것은 본인이 알고 있는 법이라든지, 오랫동안 견문에 익은 것이라든지, 또는 선천적으로 가지고 있는 특별한 습성 등을 이른다. 서로의 특성을 이해하지 못하면 다정한 사이에도 충돌이 생기기 쉽고 심하면 미운 마음까지도 나게 된다. 외도들이 부처님의 흉을 팔만사천 가지로 보았지만 사실은 부처님에게 잘못이 있어서 그런 것이 아니다. 지견과 익힌 바가 서로 달라서이다. 보기 싫은 사람이 생기면 먼저 사람마다 특성이 있음을 이해하려는 노력을 해야 한다.     '틀린 것이 아니고 다른 것입니다.' 흔히 하는 말이다. 그럼. '틀린 것'은 없을까. 불교의 핵심을 '제악막작 중선봉행(諸惡莫作 衆善奉行ㆍ악을 그치고 선을 행하는 것)'이라고도 하고, 계율 수행은 결국 정의를 취하고 불의를 버리는 일이다. 궁극적 의미에서 옳고 그름을 구분하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니지만, 현실에서는 선과 악, 정의와 불의를 구분해야 한다. 문제는 우리의 분별주착으로 인해 옳고 그름을 구분하는 일이 만만치 않다는 데 있다.   한국 남편과 일본 부인이 이순신 장군과 도요토미 히데요시 중 누가 더 훌륭한가에 대한 토론을 했다. 대부분의 한국인은 명나라와 조선을 복속시키려 했다는 이유로 도요토미 히데요시를 역사적 위인으로 인정하지 않으면서도, 정복군주인 광개토대왕은 한민족의 영웅으로 생각한다. 다른 사람을 틀렸다고 비난할 때, '내 생각이 틀리 수도 있다'는 가능성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살다보면 '나를 괴롭히기 위해 이 세상에 태어난 것 같은 사람'을 만날 때가 있다. 필자의 경우에는 군대 선임이 그랬다. 누가 나를 미워하거든 먼저 그 원인을 생각해서 미움 받을 만한 일이 나에게 있었거든 고치기에 힘쓰고, 그러한 일이 없거든 전세의 밀린 업으로 알고 안심하고 받으면 된다. 게다가 누군가 나를 미워할 때에 나의 마음이 잠시라도 좋지 못한 것을 미루어 나는 누구에게든지 미움을 주지 않으리라고 다짐을 하게 되면, 나를 미워하는 사람이 곧 나의 마음 쓰는 법을 가르치는 선생이라는 생각도 못할 이유가 없다.   종교생활이나 진리공부, 마음공부를 오래 해 왔다면, "원수를 사랑하라" "모두가 부처님"이라는 말이 어색하지 않을 수도 있겠다. 아직 그 경지에 이르지 못했다면, 먼저 각자가 다른 특성이 있음을 이해하고, 나의 견해와 판단이 얼마든지 틀릴 수도 있고, 미운 사람이 나의 마음공부 스승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하면 상종하기 싫은 사람을 대할 때 조금이나마 여유가 생기지 않을까.   drongiandy@gmail.com 양은철 / 교무·원불교 미주서부훈련원삶의 향기 상종 진리공부 마음공부 도요토미 히데요시 돌아이 질량보존

2023-09-11

[삶의 향기] 세상은 아름다운 꽃밭이다

산색은 벌써 가을을 머금었다. 밤나무 아래 이른 밤송이가 떨어져 뒹군다. 갈색빛 작은 밤송이를 두 손으로 잔뜩 쥐어들고 횡재했다는 표정을 짓는, 산책길에 동행한 대중들 덕에 한참을 웃었다. 아침이면 산안개 가득하고 낮에는 햇볕이 따갑다. 덕분에 나무와 곡식 열매가 익어간다. 텃밭 가꾸는 손길이 분주하다. 봄부터 여름까지 입안 가득 향기를 담아주었던 채소를 뽑아낸 자리에 배추·무·상추·시금치·고수 등 가지가지의 가을 씨앗을 뿌렸다. 할 일을 마친 듯 개운하다.   여름철 학생에게는 방학이 있고, 직장인에게 휴가가 있다. 산중 절에서도 뭔가 역할이 있지 않을까 하여, 매년 장소를 가리지 않고 바삐 지내고 있다. 사람들과 솔바람을 나누고, 모든 근심을 내려놓을 수 있게 텅 빈 마당을 선물하기 위해서이다.   쉴 틈 없이 뛰어다닌 뒤에 맞이하는 나의 9월은, 그래서 할 일을 해 마친 고승의 마음마냥 자유롭다. 사람들이 남기고 간 흔적을 부지런히 정리하다가 문득 돌아보니, 지난여름에 만난 사람 모두가 내게 스승이었고 부처님이었다.   들어오는 생각 때문에 괴롭고 언제까지 이런 모습으로 살아야 하나. 이제까지 힘들게 살아왔던 시간으로 충분하다, 내 마음 깊은 곳에서 나를 연민하는 감정, 내 자신을 따뜻하게 품어 주어야 한다는 말씀이 떠올라 깊은 곳에서 뜨거운 눈물이 흘러내렸다. ‘진정 나는 누구인가!’ ‘이제까지 누구를 위해서 살아왔는가?’(김○○)   온갖 갑옷 속에 갇힌 내 모습을 보았다. 저 단단한 갑옷 속에 있는 ‘본래 고요한 마음’을 찾을 수 있을까. 찾고 싶다. 다시 수많은 생각 속에서 헤매고 싶지 않다. 이제 살고 싶다. 슬픔이 계속 찾아오더라도 위로하고 그런 나를 살피고 행복하게 살고 싶다. 서운하다고 힘들다고만 했는데 모두 감사하다. 내가 만든 틀 속에서 생각해왔구나, 자각하며 살아야겠다.(한○○)   금강 스님께서 나를 찬찬히 바라보실 때, 스님께서 일러주신 말씀, “나의 본래 마음아, 참 곱기도 하구나! 안녕? 그때야 수줍게 숨어있던 나의 본래 마음이 인사를 합니다”가 떠올랐습니다. 네, 스님. 감사합니다. 이제 저는 ‘본래 마음’으로 살아가겠습니다. 지혜를 얻고 자비를 실천하며 저의 한 걸음 한 걸음이 세상에 도움 될 수 있는 그런 아름다운 삶을 살 것입니다.(최○○)   나의 룸메이트는 자식을 잃었다. 그녀의 아픈 얘기를 들었을 때 나는 ‘내가 룸메이트인 게 다행이다’라고 생각했다. 애도와 그 치유 과정을 공부한 내가 그녀의 아픔에 조금이나마 도움이 될 거라는 생각이었다. 그러나 웬걸, 나는 그녀의 고통스러운 수행의 여정을 지켜보며 오히려 그녀가 나를 돕고 있다는 걸 알았다. 최선을 다해 아픔을 직면하고 있는 그녀를 보며 나의 덜 익은, 어설프기 짝이 없는 삶과 생명에 대한 이해를 되돌아볼 수 있었다.(손○○)   부처님은 모든 존재를 부처님으로 보고 대하라고 가르치셨다. 화엄경에 따르면, 모든 존재는 완전한 지혜와 자비를 기본으로 갖추고 있다. 달마 대사는 “성인과 중생은 동일한 참성품을 지니고 있다”고 했고, 혜능 대사는 “그대의 본래성품은 평화롭고 행복하고 자유롭다”고 가르쳤다. 이렇듯 눈 밝은 선각자는 사람을 대할 때, 마음의 바탕인 완전한 근본성품을 본다.   누군가가 나를 볼 때 지혜롭고 따뜻한 사람으로 보아준다면 얼마나 좋을까. 나를 온전한 존재로 있는 그대로 보아준다면 얼마나 좋을까. 의심스러운 눈빛을 거두고, 불안한 눈빛을 거두고, 어리석고 부족한 사람으로 여기는 눈빛을 거두고, 나의 겉껍질인 게으르고, 욕심부리고, 질투하고, 짜증을 내는 마음마저도 따뜻한 자비의 마음으로 감싸주며 “너의 본마음은 밝고, 청정하고 지혜롭다”고 확인해주는 이가 있다면 얼마나 기쁘고 행복할까.   신라 의상 스님은 화엄경 60권을 배우고 ‘화엄일승법계도’라는 한 장의 그림에 덧붙인 210자의 ‘법성게’를 지었다. 우주만물은 서로 조화롭게 촘촘하게 연결되어 있으며 서로 무한히 돕고 있다는 법계연기설과, 중생과 부처가 둘이 아니고 번뇌와 깨달음이 둘이 아니며 모든 중생 이대로가 완벽한 부처라는 불이중도의 깨달음이 법성게에 담겨 있다.   법성게의 첫 구절 ‘텅 빈 우리의 마음과 우주는 원만하고 조화롭다. 그 모든 현상은 움직임 없이 본래대로 고요하다’는, 깨달음의 눈으로 본다면 개개인이 부처이고 우주 전체가 진리의 몸이라는 가르침이다.   과거에 만난 사람들이 모두 부처님이었고, 오늘 만나는 사람들이 부처님이며, 내일 만날 사람도 부처님이라면, 모든 만남이 얼마나 기쁘고 가슴 벅차게 기다려질까. 이런 마음으로 꾸려가는 삶의 모든 행위는 조화롭고 완전하다. 또한 이런 마음으로 살아가는 세상은 그대로가 큰 꽃밭(世界一花)이다. 금강 스님 / 중앙승가대 교수삶의 향기 꽃밭 가을 중생과 부처 본래 마음 금강 스님

2023-09-10

[삶의 향기] 과학의 한계

"종교와 철학, 과학 중 하나를 포기해야 한다면 어느 것을 포기하겠습니까?"     종교학 개론 첫 시간 교수님의 질문이다. 워낙 추상적인 단어들이라, 각각의 개념에 대한 일정 수준의 합의 없이는 생산적인 논의가 어려운 질문이다. 각각의 개념과 인문학적 의의에 대해 생각해 보자는 것이 교수님의 의도였을 것이다.   종교와 철학, 과학은 '진리 탐구'라는 같은 목적을 갖고 있기 때문에 때로는 협력도 하지만, 방법이 다르다 보니 주로는 대립과 갈등이 부각된다. 스님과 하버드 대학교 뇌 과학자가 '명상의 효과'를 언급했다고 가정해 보자. 대중들은 누구의 말을 더 신뢰할까.   불가에서 인과는 결정론이 아니라고 하지만, 원인 없는 결과가 없다는 인과의 사전적 의미만을 고려한다면 현재 나의 모습은 1초 전의 모습과 환경에 의해 이미 결정되어 있다고 볼 수 있고, 이를 계속 뒤로 미루면, 여러분은 태어나는 순간 이미 이 시간에 이 글을 읽을 것이 정해진다는 '라플라스의 악마'를 떠올리게 될 것이다.     불교의 인과론은 이론적으로는 결정론에 가깝다고 했던 불자이면서 서울대학교 물리학부 명예교수였던 고(故) 소광섭님이나 불교의 진리와 과학이 충돌한다면 과학을 따르겠다는 달라이라마의 입장은 과학 만능시대를 살아가는 불교인들에게 도전이 아닐 수 없다.     현대사회에서 과학을 부정하거나 도외시하는 사람은 몰상식한 사람으로 취급받는다는 것을 모르지 않지만, 오늘은 과학의 한계에 대해 생각해 보고자 한다.   우리가 과신하는 과학적 결론들은 '관측'에서 시작한다. 일단 관측조차 할 수 없는 것들이 너무 많다. 아주 작거나(소립자) 큰 것(은하수), 인간이 감각할 수 없는 것(전자기장), 갈 수 없는 곳(지구 핵심), 고고학, 우주론, 자연사, 진화론 등에서 다루는 과거사건 등은 관측 자체가 불가능하다.   관측 자체는 합리성과 객관성을 보장할 수 있을까. 한쪽 눈을 감고 다른 눈으로 코를 주시하면 코가 보인다. 안경 쓰신 분들은 안경테를 의식하는 순간 평소 보이지 않던 안경테가 보인다. 물리적으로 늘 시야에 있던 코와 안경테이지만 특별히 의식하지 않으면 보이지 않는다. 관측은 관찰자의 의식(경험 또는 지식)에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다는 '관측의 이론 적재성(의존성)'의 전형적 예다. 부처님께서 경계하신 분별과 주착은 과학에도 예외없이 적용된다.   과학철학자들은 과학자의 태도 역시 지적한다. 과학자들 역시 그들이 독선적이고 편협하다고 비난하는 종교인들 못지않게 독선과 편견에서 자유롭지 못하다는 것이다. 자연과학자들은 종교인들이 창조론을 포기할 의사가 없다고 비난하지만, 진화론자들 역시 다윈의 자연선택설을 포기할 의사가 '전혀' 없고, 물리학계에서도 아인슈타인의 상대성 원리를 인정 안 하는 사람은 정신병자 취급을 당한다.     과학 이론과 방법론은 진리 공부에 크게 기여해 왔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라는 생각에는 변함이 없다. 다만, 하늘에 있는 비행기를 보고 비를 내려달라는 것도 문제지만, 과학 만능주의 역시 인류가 경계해야할 또 다른 미신일 수 있다는 생각이다.   drongiandy@gmail.com 양은철 / 교무·원불교 미주서부훈련원삶의 향기 과학 한계 과학 이론 철학 과학 과학 만능주의

2023-08-14

[삶의 향기] 힘 빼고 삽시다

일요일 법회가 끝나면 교무와 교도들이 함께 가끔 탁구를 즐긴다.     커피 내기 등 친목을 목적으로 하는 것이라 승부에 크게 관심은 없지만, 같은 팀의 교무가 기분이 다운되어 있다거나, 특정 교도가 매번 커피를 사게 되면, 꼭 이기거나 졌으면 할 때가 있다.   스포츠를 즐기는 분들은 안다. 이겼으면 하는 생각이 강하게 드는 순간 몸에 힘이 들어가기 시작하고 긴장이 되면서 제 기량을 발휘할 수 없게 된다. 반면에 져야겠다고 다짐을 하면, 무슨 일인지 대충해도 잘 된다. 왜일까. 욕심을 버렸더니, 마음을 비웠더니, 평소 기량의 120%가 나오는 것이다.   몸에 힘을 빼라는 말은 긴장하지 마라, 욕심을 버려라, 마음을 비우라는 말과 같다. 늘 정상에 가까운 혈압이, 측정 직전에 친구의 교통사고 소식을 듣고 나니 30% 가까이 높아졌다. 몸과 마음은 둘이 아니다. 몸에 힘을 빼라는 말은 결국 마음에 힘을 빼라는 말이다.   한동안 히트곡이 없던 유명 가수가 모처럼 가요 순위에서 1등을 했다. 비결을 묻는 기자들의 질문에 "이번에는 순위에 대한 욕심을 버리고 작업을 했더니, 좋은 결과가 있었다"고 말했다.   완전히 비어야 지혜가 나타난다는 불교의 공(空), 진공묘유(眞空妙有)의 가르침에 비추어 보면 지극히 당연한 결과이다.   "스포츠는 물론이고 어느 분야든 성과를 내기 위해서는 어느 정도 긴장도 하고 승리욕도 가져야 하는 것 아닌가요"라고 묻는 이들이 있다.     맞는 말이다. 대한민국 국민은 한국 전쟁 이후 근대화라는 지상과제를 달성하기 위해 시간이 나면 한자라도 더 익혀야 했고, 한 푼이라도 더 벌어야 했다.     입시 열풍을 넘어 광풍의 한 복판에서 자라온 필자 역시 고등학교 시절 존경하던 사회선생님의 "아무것도 안 하는 것은 죄"라는 말을 금과옥조로 여기며, 한 치의 게으름도 용납하지 않고 매사에 최선을 다해야 한다는 강박 속에 살아 온 것 같다.     "있는 것은 없는 것으로, 없는 것은 있는 것으로, 있는 것과 없는 것이 다 공한 것이나, 공한 것 역시 가득 찬 것이다".   불가의 유명한 게송(깨달음을 시구로 표현한 것)이다. 긴장을 하고 최선을 다하는 것은 중요하지만, 빈 마음에 기초하지 않으면 의욕과 최선은 오히려 패배의 원인이 될 수 있음을 탁구의 예에서 명확히 볼 수 있다.     영어캠프에 참석한 초등학생들에게 가끔 이런 농담을 주고 받는다.     "교무님은 학교 다닐 때 한 번도 시험문제를 틀려본 적이 없어서 그런데, 틀리면 기분이 어때? 기분이 나쁠 거 같은데 사람들은 왜 틀리지?"     "교무님은 항상 잘난 척만 해요".   "잘난 척은 못난 사람이 잘났다고 할 때 잘난 척한다고 하는 거지, 교무님은 그냥 잘난 거야".   이런 농담을 들으면 아이들은 어처구니 없어 한다. 사실 재미도 있지만, 긴장을 풀고 여유를 가짐으로써 본래 성품을 유지하려는 수행의 일환이기도 하다.     우리는 유튜브를 볼 때나 심지어 휴식을 할 때에도 가능하면 공부와 일, 혹은 영적 성장과 관련한 것을 해야만 할 것 같은 부담이 있지는 않은 지 돌아봐야 한다.   때로는 소위 말하는 시시한 예능 프로그램을 틀어놓고 실없이 웃는 시간을 갖는 것도 정신건강과 영적 성장에 도움이 될 것 같다.   힘 좀 빼고 살아야 한다.   drongiandy@gmail.com 양은철 / 교무·원불교 미주서부훈련원삶의 향기 교무가 기분 정도 긴장도 한동안 히트곡

2023-07-17

[삶의 향기] 지식과 지혜

인생은 판단의 연속이다. 어떠한 판단을 하느냐에 따라 개인은 물론 사회, 국가의 흥망이 좌우된다. 바른 판단을 위해서는 문제를 정확히 '아는 것'이 중요하다. 아는 것과 관련 있는 것이 지식과 지혜이다. 지식을 생각하면 대학교수와 판검사가 떠오르고, 지혜라는 말을 들으면 경험 많은 노인과 종교가의 성자들이 떠오른다.   벽의 색상을 정확히 알려면 무엇이 필요할까. 육안으로도 대체적인 색상을 구분할 수 있지만, 정밀한 분석을 위해서는 기계가 필요하다. 하지만, 아무리 정밀한 기계가 있다 하더라도 관찰자가 색안경을 쓰고 있다면 말짱 헛일이다. 불가에서는, 중생들은 착심(attachment) 때문에 일과 이치를 바로 보지 못한다고 하며 이를 색안경에 비유한다.   동계스포츠인 쇼트트랙은 순위를 다투는 경기이기 때문에 결승선을 통과할 때 반칙과 그에 따른 판정 시비가 일상적이다. 한국 선수가 우승을 했지만 반칙으로 실격하기도 하고, 한국 선수가 2위로 들어왔지만, 상대의 반칙으로 금메달을 목에 걸기도 한다. 하지만, 한국인들에게 한국 선수의 반칙은 늘 오심이고, 상대 선수의 반칙은 늘 정확한 판정이다. 물론 대한민국 국민이 도덕적으로 우수할 수도 있지만, 한국 선수들은 절대 반칙을 안 하고, 외국 선수들만 반칙을 한다는 것이 가당키나 한 일인가.   축구에는, 이기고 있는 팀이 가벼운 부상에도 운동장에 누워서 시간을 지연시키는 행동을 비꼬는 '침대 축구'라는 말이 있다. 한국 팬들은 주로 중동축구를 침대 축구라며 비난한다. 몇 년 전 멕시코와의 경기에서 침대 축구를 하는 한국 선수들을 보고 민망했던 적이 있었다. 다음날 한국 신문에, "침대 축구도 전략의 일종"이라는 기사에 아연실색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러한 내로남불(이중 잣대)은 정치권에 이르면 거의 완성의 경지에 이른다. 고위공직자 청문회에서 여당은 늘 '실력검증'을 주장하고, 야당은 흠을 잡기 쉬운 '도덕 검증'을 주장한다. 정권이 바뀌면 어떨까. 같은 사안, 같은 의원임에도 정확하게 반대의 주장을 한다. 원근친소(遠近親疎ㆍ친하고 안 친함)와 사리사욕에 끌려 어리석어지는 예는 한도 없다. 이는 지식과는 무관한 문제이다.   색안경을 쓰고 벽을 바라본다면, 아무리 정밀한 기계도 색상을 구분하는 데 무용지물일 뿐 아니라, 기계가 정밀할수록 결과는 원래 색과 상관없는 색안경 색상에 가까워질 것이다. 마찬가지로, 지혜가 없다면 지식은 무용할 뿐 아니라 많을수록 해가 될 수도 있다. 큰 죄를 지은 사람들이 대체로 명문대 출신의 지식인들이라는 사실은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다.     기계가 없어도 색안경을 벗으면 붉은색을 파란색으로 하거나, 흰색을 검은색이라고 하는 치명적 실수는 하지 않지만, 아무리 정밀한 기계가 있어도 색안경을 쓰고 있으면 붉은색을 파란색으로 주장한다거나 흰색을 검은색으로 주장하는 어처구니없는 일들이 발생한다. 세상의 어지러움과 혼란은 지식(기계)은 넘쳐나지만, 지혜가 없어서(색안경을 쓰고 있어서) 일어나는 일이다. 정밀한 기계도 계속 개발해야겠지만, 정말 중요한 것은 색안경을 벗는 노력임을 명심할 일이다.   drongiandy@gmail.com 양은철 / 교무ㆍ원불교 미주서부훈련원삶의 향기 지식 지혜 한국 선수들 색안경 색상 기계도 색상

2023-05-15

[삶의 향기] 명상과 스트레스

유명 스님이 방송설교에서 명상이 본래 목적인 깨달음보다 스트레스 감소나 힐링의 수단으로 치부되는 세태에 안타까움을 토로하셨다.     종교의 목적에 대해 생각해 보자. 불교의 궁극 목적이 깨달음이라는 것은 부인할 수 없지만, 일반인들이 주로 관심을 갖는 마음의 평안이나 현실적 행복 등이 '깨달음'에 비해 하찮다고 말할 수 있을까. 깨달음을 목적으로 한다면 더할 나위 없겠지만, 스트레스 감소와 힐링을 목적으로 명상을 하는 것, 나아가 육신의 건강을 위해 명상을 한다 해도 마다할 이유가 없다.   불교적 맥락에서 깨달음의 장애물은 집착과 어리석음이다. 스트레스 감소를 통한 마음의 평안은 집착과 어리석음을 제거하기 위한 훌륭한 바탕을 제공한다. 필자가 근무하는 명상센터의 표어를 "마음의 평안 / 지혜"로 정한 이유이다. 스트레스 감소는 불가 수행에 있어 사소한 문제가 아니다.   스트레스 감소에 명상은 어떻게 작용할까. 스트레스의 원인을 살펴보자. 첫째, 불편한 일 자체이고, 둘째는 그 일에 대한 집착이라고 할 수 있다. 동료와의 언쟁이나 사건 사고 같이 마음을 불편하게 할 '실체'가 아예 발생하지 않는다면 스트레스를 받지 않을 것이다. 설사 동료와의 언쟁이나 사건 사고가 발생했다 하더라고 거기에 '집착' 하지 않으면 역시 스트레스가 없거나, 최소한 적을 것이다.     명상은 우리의 본래 성품(자성, 불성)을 회복하는 작업이다. 우리의 본성은 크게 두 가지 특성이 있다. 하나는 고요함이고, 하나는 밝음이다. 마음이 고요하면 쉽게 흔들리지 않는다. 불편한 일이 생겨도 집착하지 않게 되어 평안을 유지할 수 있다.     밝음은 지혜이다. 불가에서 지혜는 '있는 그대로 보고 듣는 것'을 의미한다. 컴컴한 방 안에서는 쉽게 부딪혀 다치기 일쑤이다. 발 위에 무언가가 짓누르고 있어도 원인을 모르니 참는 수밖에 없다. 불을 밝히면 가구나 벽에 부딪히지 않고 움직일 수 있고, 발을 짓누르고 있는 것이 물건이면 치우면 되고, 사람이면 치워달라고 부탁하면 된다. 불가에서 지혜는 방안의 불을 밝히는 것과 같은 것이다.   명상을 통해 밝음을 얻게 되면 바르게 판단하고 바르게 취사할 수 있기 때문에 불편할 일들을 미연에 방지할 수 있고, 고요함을 얻게 되면 그 일에 집착하지 않음으로써 설사 불편한 일들이 생긴다 해도 마음의 평안을 유지할 수 있다. 다소 거칠게 설명을 했고, 실제로는 꾸준한 수행이 필요하지만 이론적으로는 명확하다.   부처님께서, "명상이라는 것은 분별과 주착이 없는 각자의 성품을 깨닫는 공부이고, 예로부터 진리공부와 마음공부에 뜻을 둔 사람으로서 명상을 하지 않은 이가 없다"고 하셨다. 마음을 다스리려면 반드시 명상을 해야 하고, 좌선뿐만 아니라 일상의 모든 일들도 일심으로 행하면 명상이 될 수 있다는 말씀이다. 선사들이 강조한 '행주좌와 어묵동정'(行住坐臥 語默動靜, 걷고 머물고 앉고 눕고 말하고 침묵하고 움직이고 가만히 있는 일상생활의 모든 순간)과 '무시선 무처선'(無時禪 無處禪ㆍ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는 선)은 이를 두고 한 말이다. 물론 좌선이 기본임은 두말할 필요가 없다.   drongiandy@gmail.com 양은철 / 교무ㆍ원불교 미주서부훈련원삶의 향기 스트레스 명상 스트레스 감소 불가 수행 불교적 맥락

2023-04-03

[삶의 향기] 종이 경전과 산 경전

다른 종교들과 마찬가지로 원불교에도 생사에 관한 많은 가르침이 있다. 죽음을 편안하게 맞이하기 위해서도 그렇지만, 그것보다는 올바른 삶의 태도와 방향을 정하기 위해서 우리는 '생사 대사(生死大事, 나고 죽는 큰일)'를 해결해야 한다.   예비 교무시절부터 생사에 관해 무수히 많은 법문을 듣고, 때로는 단상에서 대중을 상대로 '생사의 이치'에 관한 설교를 해 왔지만, 막상 몇 년 전 아버님이 돌아가셨을 때 이러한 법문들이 완전한 내 것이 되지 않았음을 실감했다. 생사에 관한 성현들의 가르침이 당시의 어려움을 극복하는 데 힘이 된 것은 사실이었지만, 실제 생사 문제에 직면하면서 비로소 머릿속에 머물고 있던 많은 가르침이 가슴으로 생생하게 느껴졌다.   경전이라 하는 것은 일과 이치의 근본 원리를 밝혀 인생의 방향을 정하고 정당한 도리를 행하는 데 도움을 준다. 세상 사람들은 성경이나 사서삼경(四書三經), 팔만장경 같은 서적들만을 경전인 줄 알지만, 세상만사 어느 것 하나 경전 아닌 것이 없다. 우리네 인생사라는 것이 결국은 일과 이치를 현실에 그대로 펼쳐 놓은 것이라고 본다면 인생 자체가 바로 경전이고 진리이기 때문에, 많은 성현들이 일상의 '산 경전'을 통해 진리를 깨우쳐 갈 것을 당부한다.     세상의 모든 일을 직접 경험할 수는 없지만, 실제 경험은 성현의 가르침을 보다 확실히 내 것으로 만들어 준다. 경험만한 스승이 없다는 말은 이를 두고 한 말이며, 필자가 한 사람의 인격을 평가하는데 나이를 무시하지 못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산 경전은 세상에 무궁무진하게 펼쳐져 있지만, 이는 아무나 볼 수 있는 경전이 아니다. 아무리 좋은 글이 있다 하더라도 영어로 쓰여 있다면 영어를 모르는 사람에게는 휴지조각과 같은 것처럼, 산 경전을 보고자 하는 의지와 볼 수 있는 안목을 갖추지 못한 사람에게는 아무리 훌륭한 산 경전들도 그저 그런 일상일 뿐이다. 필자와 같이 자연과학에 관심이 없고 문외한인 사람은 떨어지는 사과를 수백 번 본다 한들 '중력'을 떠올릴 리가 만무하고, 인과와 은혜에 대한 기본적인 이해가 없다면 본인에게 닥친 행불행에서 진리적 의미를 찾는 일은 요원할 수밖에 없다.   평소 수양을 통해 마음을 맑히고, 종이로 만들어진 경전을 통해 진리에 대한 기본적인 이해를 갖추어 가지 않는다면, 일상에서 인간과 우주에 대한 바르고 깊은 이해를 발견할 수 없다. 아무리 생사문제를 가까이서 경험했다 하더라도, 평소 수양과 생사 법문에 대한 이해 정도에 따라 깨달음의 깊이는 달라질 것이다. 불립문자(不立文字 진리는 말과 글에 있지 않다)가 지적하는 문자의 한계와 폐해에도 불가에서 여전히 종이로 된 경전을 중요하게 생각하고 공부하는 이유이다.   실지 경계를 통한 단련이 아니면 참다운 실력을 기를 수 없듯이, 산 경전이 아닌 종이로 된 경전만으로는 진리의 궁극에 도달할 수 없다. 평소 꾸준한 신앙과 수행을 통해 산 경전을 볼 수 있는 지혜와 능력을 갖추어서 일상에 무궁하게 널려있는 진리의 소식을 내 것으로 만들어 가자.     drongiandy@gmail.com 양은철 / 교무·원불교 미주서부훈련원삶의 향기 경전 종이 종이 경전 하나 경전 생사 문제

2023-02-20

[삶의 향기] 평상심(平常心)이 곧 도(道)

출가 전 정치학을 공부했다. 원불교대학교에 편입하니, 교양과목으로 ‘한국사’가 개설되어 있었다. 필자가 수강한 학기에 ‘일제강점기 정치 상황’에 대한 과제발표가 있었다. 이력이 제각각인 동료들에 비해 나름대로 자신이 있었지만, 결과는 ‘폭망’이었다. 왜일까. 과도한 자신감, 즉 자만심으로 준비를 소홀히 한 탓이다.   반대의 경우도 있었다. 원불교 대학교에서는 일 년에 한 차례 ‘부모님 모시기’ 행사를 한다. 비교적 점잖은 행사지만, 장기자랑 등의 오락성도 가미된 행사였다. 당시만 해도 그런 행사의 사회는 전문가나 끼와 재능이 넘치는 특별한 사람들만 하는 것으로 생각했다. 학창시절 간간이 학급회의 사회 정도 본 것이 전부인 필자에게는 이런 행사의 사회를 보라는 제안은 지옥에 들어가라는 말과 다름이 없었다. 하지만, 출가하면서 무슨 일에든 “No”라는 대답은 하지 않기로 원칙을 세웠기 때문에 울며 겨자 먹기식으로 수락을 하고 말았다.     쉽게만 보이던 ‘지금부터 부모님 모시기 행사를 시작하겠습니다.’ 오프닝 멘트부터 어찌나 어색하던지, 이 간단한 멘트를 100번 이상은 연습한 것 같다. 치밀한 준비 덕에 농담도 섞어가며 성공적으로 행사를 마치긴 했지만, 지금도 제안 당시의 부담을 생각하면 식은땀이 날 정도이다.   대종사께서 험한 고개를 넘으시며 말씀하셨다. “험한 길에서는 일심 공부가 절로 된다. 험한 길에서는 오히려 실수가 적고 평탄한 길에서는 오히려 실수가 많은 것처럼, 어려운 일에는 오히려 실수가 적고 쉬운 일에 도리어 실수가 있기 쉽다. 마음공부 하는 사람은 험하고 평탄한 곳이나 어렵고 쉬운 일에 마음이 한결같아야 매사에 성공할 수 있다.”   불가에 ‘평상심이 곧 도’라는 말이 있다. 평상심이란 본래 ‘조작이 없고 시비가 없고 취사가 없고 단상이 없고 범부와 성인이 없는 것’이란 의미이지만, 쉽게 말하면 ‘특별한 일이 생기기 전 편안한 상태의 마음’이라고 할 수 있다. 불가에서는 본래 청정하고 밝은 자성을 회복하여 경계를 당했을 때 자성으로 반조하라고 가르치지만, 자성의 개념이 어려우신 분은 특정 경계 이전의 편안한 마음 상태를 표준 하면 된다.    대종사께서 말씀하셨다. “일 없을 때에 일 있을 때의 준비가 없으면 일을 당하여 당황함을 면하지 못할 것이요, 일 있을 때 일 없을 때의 한가한 심경을 가지지 못한다면 마침내 판국에 얽매인 사람이 되고 말 것이다.” 일 없을 때에는 주로 게으름을 피우고, 일 있을 때는 당황하여 실수투성이인 필자로서는 뜨끔하지 않을 수 없는 법문이다.   일을 당해 쉽다고 자만할 것도, 어렵다고 불안해 할 것도 없고, 일이 없다고 게으름 피울 일도, 준비가 덜 되었다고 당황만 할 일도 아니다. 일의 순서를 잡아 그 상황에서 할 수 있는 일들을 최선을 당하여 태연히 행하면 될 뿐이다. 이것이 평상심이 도라 하신 성현들이 본의일 것이다. 물론 말처럼 쉬운 일은 아니다. 마음이 어디에도 끌리지 않을 수양력을 길러야 하는 이유이다.   drongiandy@gmail.com  양은철 / 교무·원불교 미주서부훈련원삶의 향기 평상심 실수투성이인 필자 마음 상태 전부인 필자

2022-09-19

[삶의 향기] 포기의 미덕

치과에 갈 때마다 치과 선생님은 “왜 이렇게 스트레스를 많이 받으세요” 하신다.     당연히 치아의 건강과 스트레스는 상관관계가 있겠지만, 문제는 마치 “그 쉬운 걸 왜 못하세요”라는 듯한 뉘앙스다. 가벼운 인사 겸해서 하시는 말인 줄 알기 때문에 불쾌한 정도는 아니지만, “누군들 스트레스받고 싶어 받나요”라며 속으로 볼멘소리가 올라오곤 한다.   마음을 비우는 것이 행복의 첩경임을 늘 강조해 오면서도 어떻게 마음을 비우는가에 대한 안내가 없다면, “비워야 하는 건 알겠는데, 그게 쉬운 게 아니잖아요” 하는 독자들의 볼멘소리를 필자 역시 듣게 될지 모를 일이다. 명상이나 염불 외에 보다 현실적인 방법들을 소개해본다.   첫째, 포기할 건 포기해야 한다. 불가에 ‘무관사(無關事)에 동하지 말라’는 말이 있다. 나의 능력 밖의 일에 대해 과도한 관심을 갖지 말라는 의미다.     우리가 하는 대부분의 걱정이 실제로는 별 의미가 없다고 한다. 응원하는 팀이 지면 그날은 분해서 잠을 못 잘 만큼 학창시절에 농구를 좋아했다. 속을 끓인다고 승부가 바뀔 리가 없다. 5년 전 동남아시아 불교 유적 답사 중 소매치기를 당했다. 분하고 억울했지만, 해외에서 필자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곤 현지 경찰에 신고하는 것뿐이었다. 마음을 끓인다고 소매치기 이전으로 돌아갈 수는 없는 노릇이다. 돌아보면, 내가 어찌할 수 없는 일로 인해 고민하고 걱정하는 경우는 의외로 많다. 포기할 건 포기하는 지혜가 필요하다.   둘째, 대치(代置) 공부다. 작년에 원불교 신문사에서 교리 관련 칼럼 요청이 있었다. 현재 맡고 있는 훈련원 건축이 어려움에 부닥쳐 있어 정신적으로 여유가 없는 상황이었지만 거절할 명분이 없어 수락했다. 최소한 칼럼을 준비하고 쓰는 동안만큼은 훈련원 걱정에서 벗어날 수 있었고, 이러한 정신의 휴식은 어려운 시기를 버티고 맑은 정신으로 훈련원 일을 해결하는 데 결정적 역할을 했다. 어떤 일에 집중하는 것은 명상과 비슷한 효과를 내는 경우가 많아 잡념을 제거하는 데 도움이 된다.   셋째, 내가 하는 일은 ‘베푸는’ 것이 아니라 ‘갚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훈련원 건축을 하다 보면 사업 허가나 도로포장 등을 위해 이웃의 허락을 받아야 할 일이 종종 생긴다. 평소 왕래가 없던 이웃에겐 거절을 당해도 서운한 마음이 덜하지만, 작년 추수감사절에 와인을 선물했던 이웃이 거절하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와인까지 선물했는데도 불구하고 허락을 안 해주다니’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작은 선행이 오히려 큰 죄업을 짓게 되는 경우’이고, 불가에서 무상보시(無相布施·베풀었다는 관념과 상이 없는 것)를 강조하는 이유이다.     모두가 은혜이니 보은하는 것은 당연하고, 인과로 보면 베푸는 것과 갚는 것이 둘이 아니다. 필자같이 가진 것이 없는 사람도 때로는 정신, 육신, 물질로 보시할 경우가 생긴다. 보시할 때, 은혜를 베푼 후에 관념과 상을 놓으려 하기보다 은혜에 보답한다고 생각하면 어떨까.     마음은 비우면 편안해지고 밝아진다. 불교 공부는 마음을 비우는 것이다. 결코 과언이 아니다.   drongiandy@gmail.com 양은철 / 교무·원불교미주서부훈련원삶의 향기 미덕 훈련원 걱정 훈련원 건축 원불교 신문사

2022-08-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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